만약에 자동차 따위를 가볍게 던져대는 외계인이 당신이 사는 동네에 출몰했다고 치자. 그렇다면 당신은 무엇을 할 것인가? 도망치거나 대피하겠다고 하는 이들이 대부분일 테다. 그러나 이 영화는, 총을 꼬나쥐고 달려드는 인간들, 절대 질 수는 없노라고 목 터져라 외치는 주체들의 이야기이다.

이들의 주체성은 사건이 발발하기 전까지는 공고해 보인다. 그들은 가축을 기른다. 다른 종의 생물을 배치하고, 규율하여 그 신체를 자원 삼는다. 그들은 사냥을 한다. 수렵지에는 그들이 성취해낸 동물 가죽들이 자랑스레 널려 있고, 그 시체 부산물 사이에서 그들은 자연스레 밥을 먹고는 한다. 그들은 치안을 지키고, 순찰을 돌며, 체제를 유지시킨다.

그러면서 동시에, 그들의 주체성은, 위협당한 채이다. DMZ 주변부에 위치해 있다. 민방위 인구가 8명밖에 되지 않는다. 멸공과 대북 선전에 둘러싸여 생활한다. 분단에 대한 통제력은 전혀 갖지 못했는데도 불구하고 그 영향의 지배 하에 묶여 살아간다.

사건의 발단이 먹히지도 않고 살해당한 소로부터 시작한다는 점에 주목해보자. 소는 인간적 질서 하에 “먹히기 위해 있는” 가축이며, 그것을 먹지도 않고 살해함은, 훼손함은 그 질서에 대해 극명히 반기를 드는 행위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다시금, 주체되기 위해서는 외계인을 향해 통하지도 않는 총을 갈기다 몸이 터져 죽는 것을 포함해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외계인은 그런 인간을 순식간에 타자의 자리, 피식민자의 자리에 놓아버린다. 영화 속 인간들이 자연을 자원과 해수로 분류하고, 반공 체제가 공산주의자와 북한을 절멸해야 할 적으로 생산해왔던 것처럼. 그런 의미에서 인간은 자연에게 있어서 이미, 외계인이어 왔다. 그런 인간들이 이 영화에서는 순식간에, 외계인에 의해, 적으로 분류되고 해수처럼 사냥당하며 피식민자의 위치로 전락한다.

이에 저항하기 위해서 총이 등장한다. 더 큰 총, 더 큰 무력. 팔루스에 대한 집착이라 보아도 무방할 테다. 패배해버린 주체성을 복권시키기 위해서 작위적으로 적대를 표하는 언행을 하며, 자기 집단을 단속하고, 적의 죽음에 사기를 고양시키려 시도한다.

그리고 실패한다. 고성기는 차가 급커브를 트는 바람에 떨어져버린다.

이 모든 것을 목격한 나는, 굉장히 진이 빠졌다. 타자에 의해 식민주의적 주체성의 위협받고, 그것을 복권하기 위해 총알을 존나게 갈기고, 그 모든 시도가 허탈하게 실패해버리는 일련의 사건들을 목격하고서 진이 빠지지 않기란 쉽지 않다. 나홍진씨는 식민지 남성성의 주체성 복권이 어떻게 실패하는지를 집착적으로 폭로한다. 그래, 나는 나홍진씨가 이 식민지 남성성, 다시 말해, 어떻게든 주체성을 복권하려는 모든 시도를 전혀 믿지 않는다고 느꼈다. 그러면서 그는 그것에 집착한다.

주체성의 복권은 계속해서 재식민화의 형태로만 제시된다. 그들은 식민적 질서로부터 벗어나고자 하지 않는다. 대신, 그 질서 안에서 다시 주체의 자리를 차지하려 든다. 여러분도 보셨겠다시피, 계속해서 총을 쏨으로써 사냥꾼의 자리를 획득하려 기를 쓴다.

이 영화의 제목은 <HOPE>, 희망이다. 주체성을 복권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 그럼으로써 탈식민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 그리하여 우리가 당한 이 폭력, 우리의 정신에, 영혼에 아로새겨져버리고야 만 패배의 흔적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으리라는 희망.

그러나 잊어서는 안된다. 이 영화 자체가, 외계인으로부터, 질서를 파괴해버리며 등장한 타자로부터 승리하고 우리의 주체성을 회복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으로부터 시작했다는 사실을. 나홍진 감독이 보여주는 것은 희망의 가능성도, 성취도 아니다. 다시 지배자가, 사냥꾼이 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은 계속해서 실패한다. 그렇다면, 어쩌면 이 영화에서 포기되어야 하는 것은 희망 그 자체가 아니라, 주체성을 복권하라는 명령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