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먼은 학습해서 발전해나가고자 하는 태도를 갖춘 준비된 학생이다. 그 말이 무슨 뜻이냐 하면, 이번에는 명령 없이도 제 알아서 꿇고 벗었다는 거다. 메리는 약간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하는 양을 지켜보다 다리를 꼴 뿐이었다. 저번 같은 어설픈 매도는 없나 보군, 노먼은 속으로 미약하게 안심한다.

이번 계약서는 꽤나 길었다. 노먼은 더 강한 것을 원했고, 메리도 의외로 군말 없이 수용했다. 그러나 수용과는 별개로, 메리는 안전에 있어서는 강박적이다 싶을 정도로 주의했다. 어디까지 되는지, 무엇이 안되는지를 집요하게 써내려가는데, 토 조금이라도 달면 바로 아예 없던 일로 만들 기세라 노먼으로서는 가만히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여전히, 악필이었다.

조잡한 수갑이 채워지는 것을 순순히 기다리며 노먼은 생각했다. 쿠팡에서 만 얼마에 팔 것만 같군. 메리는 습관적으로 노먼을 모욕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그것 또한 합의된 사항 중 하나였다. 모욕하지 않기. 모욕을 당하는 것이 불쾌해서는 아니었다. 노먼은 이번을 기회로 솔직히 고백했다, 모욕당하는 것에 그리 큰 감흥을 느끼지 않는다고. 모욕 대신 메리의 입에서 나온 것은 확인이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그만두고 싶으면 말해야 해.”

반말은 못 버리겠나 보다. 노먼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바닥에 주저앉은 자세를 바로잡았다. 메리는 그 앞에 서서는 심호흡을 하더니 손을 높이 치켜들었다. 노먼은 그 모양새를 피하지 않고 눈에 담으며 기다렸다.

뺨을 맞는다. 눈앞이 핑핑 돈다, 그 세기가 엄청났는지 휘청이며 쓰러져 바닥에 머리를 박았다. 배에 주먹질을 당한다. 반사적으로 배에 힘이 들어가고, 위를 잘못 맞았는지 헛구역질이 나온다. 머리채를 잡혀 질질 끌려다닌다. 바닥의 먼지 따위가 얼굴에 비벼지는 게 느껴진다. 메리가 턱을 주먹으로 때리자, 속절없이 비명이 튀어나온다.

난데없는 고통이, 폭력이 저를 휩쓴다. 다시금 이걸 내가 원한 게 맞는지 하는 의문이 떠오르려다 사그라든다. 만족을 떠올릴 겨를이 없다. 만족을 떠올릴 내가 없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일을 하고, 어떤 생각을 하는 사람인지 희미해진다. 그 곳에는 노먼이 없다. 몸만이 있을 뿐이다. 얻어맞고, 학대당해서 바들바들 떨며 신음하는 몸. 아니, 몸마저도 없을지도 모른다. 그 곳에는 고통만이 있다.

그렇게나 세상이 선명해질 수 있으리라고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렇게나 단순하고, 명료한 진리를 갖췄으리라고는. 노먼은 정신이 없는 와중에, 겨우 끌어모은 여력으로 짧게 감탄이나 하고 만다. 물론 재차 뺨을 맞자 바로 멈추기는 했다만.

노먼이 흐느끼다시피 신음할 지경이 되어서야 타이머가 울린다. 엎어져 경련하는 몸 위에 선 메리는 평소보다 격렬한 신체활동에 쌔근거리는 숨을 진정시키고는 땀을 훔치며 침대에 앉았다. 시발, 죽겠네. 사람 패는 것도 일이다. 메리는 끊었던 담배를 찾아 입에 물었다. 한 대 피우고 나서야 뭐 묶은 것을 풀어주든 할 수 있을 거 같았다. 노먼이 신음하던 소리가 잦아들고, 메리가 뻐끔거리는 소리만이 방을 채우기를 몇 분, 노먼이 갈라진 목소리로 뱉은 첫 마디는 이랬다.

“메리 씨, 운동을 하시는 걸 추천드려요.”

개색캬. 메리는 참지 못하고 욕설을 뱉었다.

어디는 보라색, 저기는 파란색 그리고 조금씩은 노란색으로 물든 몸. 점점이 딱지가 앉아있다. 노먼은 거울에 여기저기를 비춰보며 괜히 입맛을 다셨다. 파스와 밴드 따위를 덕지덕지 붙이고 출근하자 동료들은 기다렸다는 듯 너도나도 말을 붙였다. 어쩌다 이렇게 됐냐는 둥, 어디 패싸움이라도 벌였냐는 둥. 정말로 걱정돼서라기보다는 할 일이 없던 차에 이벤트 발생이라는 느낌이었다. 걱정을 사는 취미는 없지만서도, 어떻게 화장품 따위로 가릴 수 있는 범위도 정도도 아니었기에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지금, 이렇게 거울에 몸을 이리저리 비춰보는 노먼의 속을 채운 것은 만족감이 아니었다. 스스로가 이렇게까지 손상되었다는 사실에 대해 큰 감흥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정말 놀랍게도. 대신 노먼이 느끼는 것은 진한 아쉬움이었다. 이 상처가 증언하는 고통의 시간이 오래가지 않았다는 아쉬움. 노먼은 기억한다. 그 무엇도 생각할 수가 없었던 순간을. 그 순간이 찾아왔다는 사실조차도 알 수 없었던 순간을… 더 길고, 강한 고통이 필요하다. 더 길고 강한 순간을 위하여.

불현듯 고개를 돌리자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약통이었다. 정확히는 수면제. 한동안 노먼이 불면증에 시달리다 못해 병원에 들러 처방받은 것이다. 복용하면 자신이 무얼 하는지, 무얼 느끼는지도 제대로 자각되지 않았다. 은근히 잦아진 복용에 근무시간에까지 무얼 했는지 제대로 파악되지 않을 지경이 되어 끊을 수밖에 없었지만 말이다. 모든 약은 독이기도 하다니까, 정말로… 노먼은 선현의 말을 되뇐다.

이내 노먼의 머릿속에는 한 가지 아이디어가 떠오른다. 고통과 수면제… 그것들을 합치면, 더 강렬하게 스스로를 잃어버릴 수도 있지 않을까? 제정신을 더 늦게 되찾을 수도 있지 않을까. 노먼은 이것을 생각해낸 스스로의 머리가 생각보다 나쁘지 않게 굴러간다고 판단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