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 10년간 정신병자가 많아졌습니다. 많이 가시화되기도 했고, 병원의 진입장벽이 낮아지기도 했고, 진단에 거리낌이 덜해지기도 하였지요. 거리낌일까요, 그건 어떻게 보면 진단의 남용일 수도 있겠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저도, 그 많은 정신병자 중 하나입니다. 자살사고를 처음 느끼고 자해를 처음 시도한 지 10년이 되어갑니다. 그러나 오늘의 이야기는 정신병자인 저에 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정신병자인 친구에 대한 이야기라고 할까요.
끼리끼리 만나기 때문에 저에게 정신병자인 친구가 유독 많을 수도 있지만, 그것 때문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우울증이 마음의 감기인 시대이기 때문일까요? 감기는 언제든지 폐렴으로 진화해 저희를 죽일 수 있으니 직관적인 비유일까요? 그런데, 매일 밤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며 울부짖곤 하여도 매일같이 일터에 몸을 이끌고 나아가야 하는 게 감기가 맞을까요?
정신병자들은 생각보다 마주치기 쉽고 “멀쩡한 사람”로서 잠복해 있곤 합니다. 그러다 어느 날, 도무지 정신병이 참아지지 않을 때에 저희의 뒤통수에 정념을 발사합니다. 어떤 친구들은 숨기려 해도 숨겨지지 않아서 당당하게 아니면 가끔 수치심에 가득 차서는 정신병을 흘리고 다닙니다. 매일같이 트위터에 씁니다. 너무 괴로워, 다 쓸모없어, 아무도 나한테 도움이 안 돼, 죽어버리고 싶어, 아… 이게 뭐죠? 내가 이걸 왜 봐야 하죠? 이거 폭력입니다. 그래도 좋아하니까 우리는 그들을 견딥니다. 가끔은 손도 내밀어 봅니다. 너에겐 내가 있잖아. 아니면 화도 납니다. 아니, 나랑 있어서 좋다매, 나랑 있을 때도 안 즐거운 거야? 그렇게 발화하는 순간 단절당하고 맙니다. 그러면 당신은 화가 머리 끝까지 납니다. 이 정신병자 새끼, 내가 참아주고 놀아주고 정신병도 다 받아줬는데 감히 나를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다고? 감히? 내가 특별하지도 않고, 나한테 특별하다고 말이나마 해 줄 용의도 없다 이거지?
정신병자와 친구하기란 어려운 일이 맞습니다. 그들은 대부분의 경우에 배은망덕해서 우리가 그들을 감내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감사하지도 않고, 보람도 없게 계속해서 우리의 자원을 착취해대고 흡혈해댑니다. 그들이 죽고싶다고 발화할 때에 우리의 당혹감이란! 애인이랑 헤어졌다고 죽고 싶답니다. 구직이 안 돼서 자해를 하고 오버도즈를 한답니다. 아니, 그 정도는 좀 견뎌 보라고요. 모두 다 그러고 살고 그딴 일을 당하면서 사는데, 왜 당신만 유난히 못 참고 못 견뎌하나요? 그냥 씨발삼창 하고 담배 좀 피우고 치우라고요! 그렇게 말했지만 우리도 압니다. 그들의 미친 데에는 다 이유가 있겠지요. 그들의 존재가 뿌리내린 역사 전반, 아마 어릴 때 엄마가 제 때 분유를 주지 않았던 영유아기부터 시작해서 아버지 역할의 부재, 집단 따돌림, 당했던 강간들 그리고 잘못된 연애들까지, 어떻게 말 한 마디 예쁘게 상냥하게 해준다고 해서 마법처럼 정신병이 나을 수는 없는 원인이 있을 겁니다. 미칠 만 해서 미친 거고 죽을 만 해서 다들 죽으려 드는 걸 겁니다.
아니, 이유가 있는 게 맞을까요? 우리가 이해하려고 다 “그럴 만한 일이다”라고 했지만 저를 포함해, 정신병자인 우리 모두는 압니다. 이유 없습니다. 그럴 만한 일도 아니었습니다. 그냥 잘못 넘어져서 갈비뼈에 금이 가듯이 불운해서일까요? 그럴 만한 사람이어서일까요? 아니 미칠 만한 사람이어서 미쳤고 죽을 만한 사람이라서 죽으려 드는 걸까요.
우리의 말 몇 마디가 그들이 처한 구조적인 곤경을 드라마틱하게 뒤엎어줄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나면, 스스로의 무력감에 또 다시 당혹감을 느끼게 됩니다. 친구가 죽고 싶다는데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습니다. 아아 아버지에게 계속해서 맞아서 집을 나온 친구에게 집을 마련해줄 수 없었습니다. 친구의 매일같은 전기고문에 도망친 전애인이 되어줄 수 없습니다, 그 전기고문을 나라고 해서 견딜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 무엇보다 저는 그 친구가 사랑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공공장소의 화장실에 모두의 화장실을 마련해줄 수 없습니다. 트랜스젠더 친구가 학교폭력을 당하는 것을 막을 수도 없습니다, 저는 그 학교에 다니지 않는걸요. 친구의 사진이 매일같이 인터넷에 모욕적으로 합성되어 나돌아다니는 것을 막을 수도 없습니다. 내가 할 수 없는 것이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친구는 죽고 싶어합니다. 전부 내 탓입니다. 내가 무능력해서입니다.
그러면 친구에게 그런 말을 하곤 합니다. 인터넷에 얼굴 사진은 안 올리는 게 좋지 않을까? 트위터를 잠시 쉬는 건 어때? 학교 나와도 다들 검정고시 치고 잘 하더라… 새 사람을 찾아봐. 그 사람이 이상했던 거야, 너는 *참아주기 힘든* 정도의 정신병자가 아니거든! 구라입니다, 원래 정신병자는 전부 참아주기 힘든 게 맞습니다. 이런 말을 하면서 내가 뭐라도 했다고 같이 있어줬다고 만족합니다. 아니 심지어 가끔은 지칩니다. 정신병자에게 세상은 매일같이 가혹하고 정신병자는 매일같이 정신병을 토해냅니다. 그러면 나는 매일같이 거기에 대고 예쁜 말 상냥한 말을 궁리해 내어주어야 합니다. 나도 내 삶이 있는데도요!
피로해집니다 아아… 가끔은 적극적으로 가끔은 수동적으로 내 자원을 착취해대는 정신병자 새끼들을 보면서, 아아 이래서는 안 돼. 내가 감정 쓰레기통으로 쓰이고 있어, 하고. 혹은, 이 친구에게 잘못은 없지만 내게 여력이 없으니까, 나한테 자원을 앗아가기보다는 주는 친구들 중심으로 좀 살아봐야겠어, 하고. 아니면, 정말로 솔직해져서는, 책임지기 싫어서. 아 그래 씨발 책임지기 싫어서 왜 친구했다고 해서 누군가가 죽을랑 말랑 하는 문제가 내 삶에 들이닥칩니까? 왜 내가 관심 좀 기울이고 기울이지 않았대서 누구의 목숨이 오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죠? 이거 너무 피곤합니다! 이런 말하자면 속물적인 계산 속에서 누군가를 멀리하기도 합니다. 단절은 아니고, 뮤트를 하고, 조금 말을 덜 걸고, 생일 파티에 다른 친구들을 부르고…
그리고 가끔은, 친구가 죽습니다.
그렇습니다. 죽는다 죽는다 맨날 염불 외길래 영원히 이러겠군 싶었던 인간들이 진짜로 정말로 진심으로 죽어버립니다! 이 새끼, 해냈구나! 아아 그러면… 그러면 씨발 나는 어쩌죠? 아니 진짜 어쩌지요? 내가 관심을 안 줘서 죽은 걸까요? 내가 소홀해서 아니 내가 무능력해서? 내가 트랜스젠더 인권을 같이 안 외쳐줘서? 그 친구가 몸 팔다 강간당했을 때 함께 있기보다는 침대에 누워 넷플릭스 보기를 택했기 때문에? 돈 없어서 삼일째 라면만 먹고 있다고 할 때 삼 만원 빌려주지 않아서? 아아아 씨발… 친구 하나 잘못 뒀다가 이게 무슨 고생입니까? 화가 납니다. 아니 왜 죽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진짜, 정말로 죽어버리기 직전이었으면 나한테 연락 좀 하지! 나한테 말 좀 하지, 그러면 아 얘가 이번에는 진심이구나, 하고 나도 자원을 특별히 나누어주었을 텐데, 왜 그리하지 않고 그냥 말 없이 죽어버려서! (아닙니다, 그 친구는 수 차례 죽고싶다고 말을 했습니다) 화가 납니다. 화가 나는데, 아 화내는 걸 들어줄 사람이 없습니다. 아니? 얘가 뒤져버려서 화가 나는 건데 뒤졌기 때문에 얘는 이걸 들어줄 수가 없다고요? 이게 무슨 일이죠? 그런 생각을 하고서야, 비로소 죽음이라는 게 뭔지 알게되는 것 같습니다… 알고 싶지 않았는데도. 한 번도 알고 싶다고 말한 적 없는데도.
그러면 대체 정신병자랑 친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들을 내 인간관계 망 바깥으로 배제해버리기도 비윤리적인 것 같고, 그들에게 내 다정한 말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들이 처한 구조적인 늪으로부터 구제해줄 수도 없고, 매일같이 품을 들이기에도 피로하고… 그리고 가끔씩 픽픽 죽어나가버리는 이것들을 대체 우리는 어찌해야 할까요…
뜬금없지만 영화 얘기를 하나 해 볼게요. 원령공주라는 영화를 저는 이번 주에 봤습니다. 폐쇄적인 마을에서 사는 아시타카라는 청년이, 자연과 문명 간의 싸움에 휘말리는 내용입니다. 기술을 발전시킨 인간에게 패배한 재앙신이 애먼 데에 화풀이하러 자기네 마을에 들어와서 여동생을 죽이려 들자 아시타카는 “어째서 그렇게 화가 났습니까, 진정하세요” 하고 외칩니다. 저는 거기서부터 내 정신병자 친구들에 대해서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세계가 얼마나 가혹한지, 그들의 삶이 어떤지… 어떤 고통과 원한을 가지고 있는지 잘 모릅니다. 그래서 의아해지죠. 어째서 그렇게 화가 난 거야, 어째서 그렇게까지 생각하고 그렇게까지 반응하는 거야…? 이해가 안 돼, 하고.
그러던 아시타카는 원령공주를 만납니다. 아아 원령공주… 사람에게도 인간에게도 속하지 않고 계속해서 자기 자신의 존재를 해명하고 변호해야만 하는 불행하고 “추한” 공주. 인간임에도 자연의 편에서 싸우는 이단아. 아시타카는 원령공주가 처한 곤경을 해결하고 싶어집니다. 원령공주의 의붓어머니인 늑대신, 모로와 이런 대화를 합니다.
아시타카: 산은 어쩔 셈이야? 그 애도 죽음의 길로 데려갈 거야?
모로: 역시 이기적인 인간답게 멋대로 생각하는군! 산은 우리 일족의 여자다. 숲이 살면 산도 살고, 숲이 죽으면 산도 죽는다.
아시타카: 산을 놓아 줘! 그 애는 인간이야!
모로: 어디서 입을 놀려! 네가 그 애의 불행을 없애 줄 수 있어?! 숲을 침범한 인간들이 젖먹이인 산을 내던졌다. 내 이빨을 피하기 위해! 인간도 될 수 없고 들개도 될 수 없는 불쌍한 산... 그 애는 이 모로의 딸이다! 그런 산을 구할 수 있느냐?!
아시타카: 모르겠어. 하지만 함께 살아갈 순 있어.
모로: 와하하하하! 어떻게 살겠다는 거지? 산과 함께 인간이랑 싸우기라도 할건가?
아시타카: 아니야! 그러면 서로 증오만 더 커질 뿐이야!
모로: 꼬마야, 지금 네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넌 머지않아 흉터로 인해 죽을 테니까. 날이 밝으면 바로 떠나거라.
그렇습니다. 우리가 그들의 불행을 없애 줄 수 없죠, 우리가 그들을 구할 수 있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함께 살아갈 수는 있다고요? 우리가요? 어떻게요? 모로가 묻습니다, 어떻게 살아갈 건데요? 이렇게, 잠깐 정신병 받아주기도 힘들어하는 우리가 대체 그들과 어떻게 함께 살아간다고 오만하게도 외치는 건가요? 우리도 모로와 같이 비웃게 됩니다. 네가 대체 뭐라고, 뭘 할 수 있다고?
그리고 영화는 결말부에 가서 대답합니다.
“나는 마을에서, 너는 산에서 함께 살아가자”
저는 그러면 생각합니다. 우리가 꼭 정신병자들과 살아가기 위해 그들이 처한 곤경을, 그들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그러나 그들이 그들이기 위해서 가지게 될 수밖에 없었던 고통을 덜어주어야만 하는 걸까요?
함께 살아간다는 건… 그런 게 아닌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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