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아지한테 진심으로 호통치는 사람과 함께하기. 내가 화장실에 가려고 방만 나서면 "누구야!" 하고 소리치고서는 도둑이 든 줄 알았다며 얼버무리는 사람과 함께하기. 드라마를 보면서 씨발새끼, 좆같은 새끼, 하고 욕을 중얼거리는 모습을 비껴보면서 정수기에서 물을 따라 마시기. 이상이 요즈음의 나의 모성에 대한 경험이다. 이 문장을 다 써놓고 내 속에서 처음으로 떠오른 문장은 "이 얼마나 수치스러운지!" 였다. 엄마, 나의 수치. 어디 가서 농담으로도 내놓을 수가 없는 가정! 이것이 "나"에게 속한다는 사실을 나는 거부하고 싶은가? (정말로?)

이것이 수치스러울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고 나면, 두 번째로 밀려드는 수치가 있다: 내가 이것을 수치스러워한다는 수치! 곤욕스럽게도 나는 이 수치스러움과 저 수치스러움 사이에 끼여버리고야 만 것이다 오오 이럴 수가...

여기서부터 내가 얼마나 가련하게도, 일종의 비극에 빠져버리고야 말았는지에 대해 주절거릴 수도 있겠지만 나는 다시 엄마에게로 돌아가보고 싶다. 이 "수치스러운" 엄마와, 수치 이전의 엄마 (그 둘을 구분할 수 있기라도 한 것 마냥!)

한 가지 (즐거움을 위하여) 짚고 넘어가고자 하는 점은, 이 엄마, 숭고함과 성스러움을 과격하게 이탈해버린 "수치스러운" 엄마가 어떻게 그로 인해 다시금 나의 뮤즈가 되었는지이다. 나의 최초의 타자, 나의 신, 나의 영감, 나의 뮤즈로서 어떻게 다시 "숭고함"으로 되돌아가버리고야 마는지!

엄마를 포함하여 가족이라는 것이 나에게는 수치스러움과 실망스러움의 총합이었는데, 그건 일종의 “나는-저것이-아니다” 하는 구분짓기와 동시에 “정말 내가 저것이 아닌가? 정말로?” 하는, 의구심을 안겨주곤 했다. 그러니까, 엄마는 나를 배태하지 않았는가? 나는 분명히 엄마로부터 나왔고, 이 가족에게 속한다. 그러나 나는 그것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확신, 혹은 확신하고 싶어하는 욕망! 그건 또 다른 욕망이다.

또 다른 쪽에는 다른 목소리들이 있다: 너의 뿌리로 되돌아가, 그것과 합일하라는 목소리. 그러니까, 그들과 동일하게 저열해지라 는 명령은 아니다. 입양아의 모친 찾기. 재미교포, 재일교포의 모국 방문. 먼지구름을 일으켜가며 창고에서, 서재에서 영유아기 시절 엄마가 쓰던 육아수첩을 찾아내기.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 하는 명령 그리고 “그건 민족주의잖아요!” 얕고 허무한 반란의 시도. 내가 하고자 하는 것도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의혹이 피어오른다. 그러니까, 내가 엄마를 보고, 가족을 보고 “수치스럽다”고 말하는 이 발화들은 “그건 민족주의잖아요!”와 유사하게 얕고, 허무한가?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니다. (언제나 말했듯이.)

사라 아메드는 분명, “국가는 슬픔에 잠겨있다” 혹은 “국가는 수치스러움을 느낀다” 하는 발화가 이상적인 국가, 우리가 소속되어야만 하는 국가의 상을 생성하고 그것과 동일시할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한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가족이 수치스럽다” 하는 나의 발화는 이상적인, 동일시할 다른 가족을 찾고자 하는 애처로운 손짓일 수도 있는 건가? 지적으로 그리고 윤리적으로 정련된, 고상한 집단. 고상한 무리. 고급진 무리. “그들이 저급하게 굴 때 우리는 고급지게 갑니다When they go low, we go high”, 미셸 오바마의 교묘한 명령을 나는 비웃으면서도 따르고 있었던 것인가! 어쩜 이런 비극이! (농담입니다,)

나는 그리고 분명, 그들을 바꾸기 위해 무언가를 시도하지도 않는다. 그러니까, 그들이 텔레비젼에 나온 연예인들이 어디를 성형했는지, 코나 눈 따위를 고쳐놓고 염치없게도 아닌 척 발뺌하는지,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그들이 기존에 갖고 있던 매력을 다 죽여놨는지 따위에 대해 의견을 나눌 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동참하지도 않고, 그저, 정수기에서 물이나 따라 마시면서(나는 물을 많이 마시고, 물을 마시거나 화장실을 갈 때를 제외하고는 방 밖을 잘 나서지 않는다) 눈이나 굴린다. 정말로 활기차군! 마치 장난감을 망가뜨리는 강아지들같아! 내가 그들을 기르기라도 하는 것처럼!

강아지 무리를 기르는 주인은 강아지 중 일부가 아니다. 햄버거를 먹은 사람이 햄버거가 되는 것은 아니듯이? (이것이 정확한 유비인지는 모르겠다, 아마 아닐 것이다) 강아지가 다른 사람을 물어서 주인이 배상해야 한대도, 그 주인이 피해자를 문 게 되지는 않지 않은가! 나는 이러한 방식으로 내가 강아지가 아님을 주장하려 시도한다. 실패하지는 않지만, 솔직히 말해, 보기 좋은 시도들도 아니다.

가끔은 강아지의 입질이 정당한 것으로 밝혀지기도 한다. 우리 집은 배달음식을 자주 시켜먹는데, 동생은 적극적으로 배달의 민족이니 요기요니 하는 곳의 고객센터에 전화를 넣어 무엇이 누락되었는지, 배달이 얼마나 지연되었는지를 따져묻고는 한다. 나는 그 광경을 지켜보면서 매번 내심 넌더리를 내는데, 한 번은 무슨 샐러드에 토핑으로 온 치킨텐더가 부족하다는 컴플레인이었다. 대충 세어만 보아도 열몇개는 되어보였는데도 말이다! 알고 보니 정말로 돈을 더 내고 추가한 치킨텐더가 누락되었던 것이었다. 그것을 알게 된 후 나를 덮친 엷은 충격! 그러니까, 그들이 무엇을 해서 내가 수치스러워하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들이 수치스러운, 그러니까 수치를 내포한 존재들이기 때문에 그들이 하는 모든 행동들이 내게 수치스럽게 다가오는 걸 수도 있다.

나만의 가정, 나만의 뿌리를 찾기 위해 골몰했던 적도 있다. 장담하건대, 내가 나의 뿌리를 거절한 만큼 나의 뿌리도 나를 거절해왔기 때문에 (정신병자, 성적으로 조숙한 아이, 퀴어, 트랜스젠더, 가출청소년, 심지어는 가출청년!) 지속돼온 필요이다. 그러나 뿌리라는 것이 얼마나 끈질긴지! 그것에 대해 저항하는 것이야말로 그것을 선명하게 만들어준다. 그러나, 저항하지 않는다 해서 희미해지는 종류의 것도 아니다.

“적극적으로 관여하고 관여되기”를 주장해온 만큼 잘 실천해왔는가? 나는 당당하게 아니라고 대답할 수 있다. 적극적으로 회피하고, 적극적으로 도망친다. 하지만 도망치기, 내빼기야말로 또 다른 실천이라는 사실을 나는 안다. 가족에 대해 불평하거나 수치스러워할 수 있을 만큼의 정당성을 확보하고 싶지도 않다. “나는 할 만큼 했어!” 하고 넌더리내는 사람이 되고 싶은 사람이야, 없을 테니까! 혹은 자랑스러운 가족을 갖고 싶은 것도 아니다. 불평하는 모든 사람들이 만족하고 싶어서 불평한다고 오해하지는 말기를! 모두 각기의 다른 이유로 불평하는 걸테지만, 나의 경우에는, 그로써 참여할 수 있다고 믿는 것만도 같다. 그것이 얼마나 허황되고 기만적인 믿음인지에 대해서는, 이 글을 일단 끝맺음으로써, 유예를 주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