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스티벌에 갔다가 여자들과 게이들만 있는 곳에선 나쁜 냄새가 별로 나지 않는다는 농담을 들었다. 헤테로 남성들 주변으로 가면 숨막힐 정도로 안좋은 냄새만 난다고 했다. 페스티벌에서는 “씻자 씻자 몸을 씻자”라는 노래가 나온다. 심지어 러쉬 직원이 씻겨주는 부스까지 있을 정도이다. 안좋은 냄새를 풍기는 건 락페에서든 일상생활에서든 민폐이고, 정당하게 기피되며 정당하게 욕먹을 일이다. 한 때 친밀하게 지냈던 이에게서는 “체취가 기분 좋게 느껴지지 않는 사람하고는 기어코 틀어져버리고야 말더군요” 하는 말을 들었다. 그 사람은 내 체취가 매력적이라고 평가했고, 웃기게도, 지금은 관계가 틀어진 상태이다.

우리는 사물에 대해서도, 냄새를 통해 많은 것들을 판별해낸다. 음식에서 이상한 냄새가 날 때 우리는 그것이 상했다고 판단한다, 그 판단은 대체로 옳다. 쉰밥을 굳이 먹어서 확인해보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수르스트뢰밍(청어 절임)이나 삭힌 음식을 냄새 때문에 못 먹는 사람도 많다. 심한 냄새, 특이한 냄새는 식욕을 저하시킨다. 그것이 먹음직스럽게 느껴지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그 음식과 냄새에 익숙해져있는 상태여야만 한다. 음식이 아닌 사물의 냄새에도 우리의 시야를 가져다대보면, 플라스틱 녹는 냄새, 담배 냄새, 하수구 냄새 따위는 우리를 불쾌하게 만든다. 그것들은 유독하고, 불결하고, 위험하게 느껴진다. 실제로도 그러하다.

반대로 새 책 냄새, 비 온 뒤 공기, 숲 속 ”피톤치드“ 냄새 따위는 기분 좋게 느껴진다. 그것들은 어딘가 깨끗하게 느껴진다. 그것들은 정화되어있고, 정결하며 그 순수성으로 인해 우리 자신 또한 정화시켜주는 느낌을 준다. 위생적이고 청결한 것들로 둘러싸이고 그것들과만 상호작용하고 싶은 욕구는 자연스럽게도 느껴진다. 이렇듯 냄새라는 것은 어떠한 판단 이전에 우리에게 현현하는 것, 판단의 결과가 아닌 판단의 재료나 근거로도 느껴진다.

유명한 독일 소설 <향수>에서 파트리크 쥐스킨트는 인간의 체취를 발효된 치즈와 식초 냄새와 유사하다고 묘사한다. 기본적으로 체취는 인간의 거죽에서 스며나오는 기름과 땀샘에서 배어나오는 체액으로 주되게 이루어져있다. 그것은 그 개체가 주로 사용하는 바디워시, 샴푸, 향수 그리고 평소의 식습관, 운동습관, 나이 따위를 통해 조정되고 변화되어 타인에게 다가간다. 우리는 아주 가끔 체향이 매력적인 사람을 발견하고, 보통은 별 감흥을 못 느끼고, 그리고 생각보다 자주 불쾌감을 느낀다.

불결한 몸, 위생적으로 관리되지 않은 몸에서는 당연하게도 냄새가 난다. 사람은 계속해서 분비물을 거죽 위로 미세하게 흘려대기 때문에, 주기적으로 씻어주지 않으면 누적되어 냄새를 풍기기 마련이다. 몸의 냄새는 보통 무른 상처, 염증, 관리되지 않은 몸, 불결한 몸에서 난다. 우리는 그것들을 보기도 전에 알아차린다. 불결한 몸은 몸 자체가 건강하더라도 상해 가는 액체들로 뒤덮여 있다. 그것은 오염되어 있다. 여기서 우리는 어떻게 생명정치가 위생을 무기 삼아 몸들을 재편하고 재배치해왔는지에 대해 들여다볼 수도 있겠다. 그러나 나는 좀 더 미시적인, 개인적인 층위로 내려가보고자 한다.

오염된 몸은 그것이 얼마나 관리되지 않았는지를 가리킨다. 관리를 넘어서서, 관리를 가능하게 만들어주는 교육이나 가정환경, 성장환경 따위를 떠올리게 하기도 한다. 그러니까, “방임가정에 자라서 00살까지 귀 뒤를 씻어야 하는지조차 몰랐다”하는 고백들을 떠올려보자. 그들 자신조차도 냄새나는 몸으로서의 자기를 결핍된 자기와 결부시켜서 서사화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기능하는 시민으로 남기 위해서라도, 무시받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의 결핍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서라도 스스로를 위생적으로 관리한다.

월경을 하는 여자에게서는 특유의 냄새가 난다는 이야기를 가끔 인터넷에서 발견한다. 그것은 스스로만이 맡을 수 있는 거다, 아니다 다른 사람도 다 맡을 수 있다, 생리적인 것이라 어쩔 수 없다, 잘 씻으면 그 냄새가 나지 않는다 등… 무엇이 진실인지는 분간하기 어렵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우리가 피 흘리고 있다는 사실이, 그리하여 건강이 흔들리는 상태라는 점이 냄새로 표출될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이다.

여성화된 몸은 남성적인 몸 혹은 섹슈얼리티 아래에 재편되기 이전의 순수한, 디폴트의 몸과 다르게 간주된다. 그것이 이미 여성화에 의해 오염되어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여체는 순수한 몸에 비해 외부에 대해 보다 열려있는, 이미 흘러나오는 몸으로서 형상화된다. 섹스만 보더라도 여체는 무언가에 의해 침습되도록 설계되어 있는 것으로 상상된다. 그것은 피나 젖, 분비물 따위를 배출한다. 보다 약하고 무르기에 쉬이 깨지고 변형된다. 그렇기에 여체들은 보다 철저한 관리 아래에 놓이고 서로의 냄새를 감시한다. 서로의 관리를 돕기 위해서라고도 말할 수 있겠으나 그보다는 여성화된 몸으로서 생존하기 위해 위생성을 강박적으로 지키고, 다른 여체를 단속한다 말함이 더 적확할 것이다. 자주 씻고, 향을 고심해서 고르며, 피 흘릴 때조차 냄새를 신경쓴다. 여고에서는 향기로운 냄새만이 난다, 부터 시작해서 “아닌데요, 제가 다니던 여고에서는 좆같은 냄새 났는데요?” 하는 첨언에 대한 열과 성을 다한 반발들까지.

그것은 성적으로 비규범적인 다른 몸들도 마찬가지이다. 앞서 이야기했던 향기로운 게이들로 돌아가보자. 성적인 것은 침습을 전제하기 때문에(섹스는 언제나 신체적인 침습의 교환이다), 오염을 전제한다. 그리고 성행위로 인해서 더럽혀지는 정도는 규범적인 행위에 비해 비규범적인 행위가 더하게 그러한 것으로 간주된다. 규범적 시선들이 퀴어 성행위에 대해 갖는 지대한 관심 그리고 타자화를 떠올려보자. “똥구멍에 좆을 넣는단 말이야?! 더러워!” 부터 시작해서, 성행위 일반에 대한 “음식 씹고 삼키는 기관을 맞대고 뒤섞는다니 역겹네요” 까지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비규범적인 몸들은 (비규범적인 성행위들 때문일까) 오염되기 쉬운 것으로 간주되고, 아니 애초부터 그 비규범성으로 인해 이미 오염되어있는 것처럼도 여겨진다.

행위이든 정체성이든, 비규범성이나 여성성으로 인해 오염되었다 간주되는 몸들은 그렇지 않은 몸들보다 철저하게 관리되며, 그 관리를 통해 “위생적임”을 주장한다. 이것은 불결하고 비위생적인 몸들을 동질하지 않은 것으로 추방시키는 행위를 통해서도 나타난다. 씻지 않는 여성, 불결한 몸, 성 매개질환에 의해 이미 감염되어버린 몸은 언제나 바깥으로 밀려난다. 그것들은 우리가 아니라고, 우리는 너희 디폴트 몸보다도 청결하다고 주장한다.

몸은 우리가 세상과 맞닿아 스스로를 표출하는 장이기도 하지만 역으로 세상이 우리에게 침습해들어오는 장이기도 하다. 언제나 힘과 권력들이 배치되고, 경합하고, 상호작용한다. 보건과 위생에 대한 정치가 우리의 몸을 규율하는지에 대해서도 그러하지만, 냄새나는, 오염된 것들이 우리에게 다가오는 장으로서의 몸 자체도 그러하다.

냄새나는 몸의 오염은, 접촉한다면, 우리에게 전염될 것이다. 오염은 언제나 끈적인다. 길고양이를 만지면 손을 씻어야 하고, 키스를 하기 전에는 양치를 해야 한다. 접촉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위생으로부터 탈락해버릴 것만 같다고 느껴버린다. 그렇기에 우리는 “역겨워!” 하는 말들을 내뱉고서는 그것으로부터 거리를 벌린다. 아니, 이미 “역겨워!”라고 하는 말 자체가 그것으로부터 떨어지는 움직임이다. 대상이 역겨운 것이 되는 순간, 우리는 그것을 역겹다 느끼는 주체로서 그것과 다른 것이 되고 그것-아닌-것이 된다.

그러나 냄새는, 오염은 언제나 우리의 속에 매복해 있다. 우리가 밀어내고 씻어내고자 하는 냄새, 분비물, 상처, 피, 땀, 점액은 몸의 바깥으로부터만 우리에게 들어오지 않는다. 그것은 몸이 몸이기 때문에, 몸을 뚫고 우리의 눈 앞에 나타난다. 아니 이미 몸으로서 우리에게 현현한다. 몸은 언제나 열려있고, 새고, 젖고, 상처 나고 냄새난다. 몸은 이미, 오염되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