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해하겠다. 나는 굴을 쳐먹고 싶다는 욕망을 가끔 견디기가 힘들다. 손쉬운 육식을 멀리하기가 힘들고 간편한 배달음식으로 일회용 쓰레기를 대량생산하는 것을 자제하기가 힘들다. 간간히 들려오는 집회 소식을 캘린더에 체크만 해놓고 가지 않은 적이 셀 수 없이 많으며, 내가 무엇을 하는지나 하지 않는지의 이전에, 나라는 사람 자체가 수많은 자원들을 잡아먹고 배태되고 유지되어 살아간다.

우리는 현대 사회가 얼마나 잘 분산되어있는지, 얼마나 파편화되어있고 모듈화되어있는지만 이야기한다. 그것이 가지는 미적인 생산성, 개개인의 고독과 말살만을 자주 입에 올린다. 영웅과 천재의 시대가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슬퍼한다. 수수하고 보편한 범인들의 집합이라는 것에, 사회의 톱니바퀴에 불과하다는 것에 한탄하고 실망한다. 혹은 기뻐하기도 한다, 자원을 갈아가며 맞물려 돌아가는 이 멋진 구조체를 봐라! 이것이 내일 네 아침을 책임진다. 이것이 네가 주말마다 몰두하는 게임을 만들었고, 이것이 네가 모레 결혼식에 입고 갈 원피스를 제공했다. 그러니 감사해야 하지 않겠어? 찬양해야 하지 않겠어? 그러나... 이것이 얼마나 조직적인 악인지에 대해서는 자주 말하지 않는다.

내가 지난 주 먹은 돼지고기는 축산업자가 매일매일 쉴새없이 도축해낸 결과물이다. 내가 오늘 주문한 물건을 내일 받고 싶어서 오늘도 물류노동자가 죽었다. 내가 세상에서 "쟁취" 해내고 갈취해낸 자원만큼, 누군가는 그것을 소실했다. 그러나 우리는 적당히, 바뀌지 않는 현실에 슬퍼하고 적당히 타협하며 살아간다. 심력은 한정되어 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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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힘없는 개개인이라는 사실은 우리의 변명이 된다. "지금 위치의 내가 어쩔 수 없는 죄이고 어쩔 수 없는 악이다." 하고 모두가 말하지. 모두가 외면하지. 이것은 모두가 나눠지는 짐이다, 불문에 부치는. 이것은 '무인도에 고립된 이들이 제비뽑기를 하여 서로 한 명씩 잡아먹었다'와 같은 가상의 이야기에서만 나오는 현상이 아니다. 지금 당신의 눈 앞에, 우리 모두가 공범인 도시괴담. 우리는 세계를 바꾸거나 구원해낼 수 없는 범인이니까, "우주의 티끌보다 작은" 인간이니까, 하고. 우리의 세계를 근본적으로 뒤흔들 수 없는 우리는 완성된 세계의 소비자처럼 군다. 내가 오늘 광화문에 나가서 시위한다고 전국민이 감명받아서 개심하진 않을 테니까, 당연하게도!

각자의 위치에서 할 수 있는 만큼씩만 노력하면 된다고도 말해볼 수 있겠다. 그러나 그것은 죄의 측면에서는 하나도 유의미하지 않다. 생각해보자. 내가 유기견 자원봉사를 나간다고 해서 누군가 먹은 보신탕이 살아있는 개로 되돌아오지는 않을 테니까! 모든 속죄는 사후적이며, 죄라는 것은 사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저질러진 것들은 수습되더라도 저질러진 그 흔적을 남기니까. 유기견 봉사, 집회에 결합하는 것, 후원을 하는 것은 누군가를 살리는 분명한 효과가 있는 행동들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미 발생한 고통을 세상에 없던 것으로 만들어주지는 않는다. 실천은, 분명, 우리를 죄로부터 깨끗하게 만들어주지는 않으니까.

본의 아니게 가담하게 된 죄를 눈앞에 두고, 죄인인 스스로에게 회귀하는 것은 경멸받아 마땅한 일이다. 타자가 받는 고통, 내가 가한 고통으로 타자에게 향하지 않고 자기에게로만 되돌아간다. 그것은 죄에 가담했다는 사실 자체보다도 비열한 일이다. “하지만 저는 유니세프에 정기후원을 한다고요!” 이 외침이 구질구질해지는 지점은, 나 개인의 윤리성이나 도덕성은 하등 쓸모없는데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나에게 천착한다는 것이다. 아프리카에서 노동착취를 당해 고통받는 아동들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초콜릿을 먹은 나의 비윤리성이 중요한가? 이 모든 사안들에도 불구하고 나에게로 회귀하고 싶은가? 누가 윤리적인지, 혹은 비윤리적인지, 왜, 어떤 기준에서 비윤리적인지 이 모든 물음들은 윤리나 비윤리를 촉발시킨 사건을 뒤로 미룬다. 은폐한다.

스스로의 윤리성을 방어하는 움직임 뿐만 아니라, 비윤리성을 비난하고 경멸하는 움직임도 다르지 않다. 팔레스타인 선수를 보호하지 않는 스포츠를 즐기는 나. 당장 내일 우산이 필요해서 쿠팡에서 새벽배송을 시켜버린 나. 여성혐오 기업의 콘텐츠를 좋아해버린 나. 죄 앞에 두고 죄인이 되어버린 나에 대해 토로하고, 어떻게 감히 나를 죄인으로 만들 수가 있느냐고 소리높여 따져묻는 것은 다시금 자기에게로 회귀하는 일이다. 분명, 운동에 참여하지 않는 나는 수치스럽다. 그러나 운동에 참여하더라도, 비건식을 하더라도 페트병 대신 텀블러를 사용하더라도 더 많은 것들을 하지 않는 나는 여전히 수치스럽다. 원죄와 실천이 양쪽에서 사지를 붙들고 잡아당기는 모양새 속에서 우리는 그 어느 쪽으로도 제대로 향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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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에게로 회귀하는 것만큼 비윤리적인 것이 없다고 했지만 결국 죄인인 것도, 실천해야 하는 것도 나이다. 타자의 고통 앞에서 나의 자리를 망각하는 순간, 우리는 책임 없는 관찰자인 체를 하게 되니까. 사해질 수도 외면할 수도 없는 죄 앞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대답은 그 누구도 줄 수 없다. 조직적인 죄는 그 피해자의 얼굴을 불분명하게 뭉개버리고, 그럼으로써 책임의 감각 또한 희미해진다. 피해자의 얼굴이 분명하게 지목되는 종류의 죄더래도 여전히 문제는 남는다. 죄인이 아니기 위해서 속죄하는 것, 그럼으로써 다시 깨끗한 내가 되고자 하는 움직임만큼이나 악한 것도 드물다.

나는 악인으로 살았고, 악인으로 살 것이다. 그리고 가끔 내 죄를 들춰보며 한탄하겠지. 이는 죄를 들춰보지 않는 이들과 별다를 것 없는 비열함이고, 죄를 통해 자기에게 회귀한다는 점에서 어쩌면 더한 비열함이다. 나는 죄를 고해하면서도 죄인인 나의 얼굴을 더듬어 만지고, 그 모양을 그려본다. 앞으로도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일부 해내고 일부는 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반추하고, 잊고, 반추하고 잊고... 그리고 오늘은 반추의 날이었다. 내일은 망각의 날이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