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든 환대받을 곳을 찾아 헤매는 사람들의 얼굴을 나는 안다. 포용해주는 문화, 내가소속될 정체성, 나됨을 나타내준다고 말해주는 이름들을 그들은 찾는다. 콰이로맨틱이라거나 걸플럭스같이 몇 개인지 세기도 어렵게 세분화된 정체성들의 목록을 떠올려보자. 그것은 어떻게든 기를 쓰고 자신이 소속될 이름을 찾고자 하는 시도이다. 최근 트위터에서는 연애하고 섹스하는 에이로맨틱* 에이섹슈얼** 에 대한 이야기로 자와자와했다. 그들은 에이로맨틱 에이섹슈얼이 아니라는 진부한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다른 정체성을 쓰라는 조언들, 애초에 에이엄브렐라*** 정체성 자체가 서로 너무나도 다른 사람들을 모아놓은 집합이기에 어쩔 수 없다는 말, 그렇기에 에이엄브렐라로 묶이면 안되고 독립적인 범주들로 취급되어야 한다는 말까지… 정체성 정치가 고도화되었기에 생겨나는 목소리들이다.

퀴어는 반규범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규범적인 섹슈얼리티로부터 내쫓기는 사람들, 내쫓기다 못해 타자화당하고, 병리화당해온 이들이 모여서 출발했다. 그리고 그 모임은, 일종의 대안적인 규범이 되었다. 주체에게서 비체로서 내쫓기고 타자로서 지시되어버린 우리는 목소리를 갖기 위해 또 다른 주체가 되고자 시도한다. 그리고 그것은 언제나 다른 규범에 대한 예속을 통해서이다. 경제적인 규범이든, 생활양식에 대한 규범이든, 정신적인 규범이든. 그러한 규범들에 맞추어 자기 자신과 다른 퀴어들을 단속한다.

이를테면 이름난 퀴어 스피커들이 퀴어성을 제외하고서는 한없이 규범적인 자신을 드러내는 모습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들은 그 지점을 꽤나 자랑스러워하는 것처럼 보인다. 혼인평등법을 제정하고 싶어하고, 아이를 낳아 가정을 이루고 싶어한다. 그러한 욕망이 잘못되지 않은 것은 분명하지만, 규범적인 시민에 부합하고자 하는 움직임이라는 데에는 논쟁의 여지가 없다. “엽기 인생”들에 대한 단속 또한 한 몫 한다. 논쟁적인 깃발을 들고 퀴어퍼레이드에 나온 기수에 대한 “비판”들, 퀴어 데이팅 앱에서 정서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안정된 긴머 일스****를 찾는 수많은 사람들을 보자. 확실히, 크로스드레서들과 BDSM 향유자들, 성노동자, 성매개질환 감염자들은 우리 퀴어와 다르다. 그것을 퀴어에 포함한다면 모욕이라 여길 사람도 있을 것이고, 모욕까지 가지 않더래도 그들의 섹슈얼리티가 비규범적인 것은 퀴어들이 비규범적인 것과는 다른 방식 이라는 데에 동의하는 사람은 다수일 것이다. 애착적으로 불안정한 사람과 에이로맨틱을 어떻게 구분하느냐는 물음은 병적인 것으로부터 거리를 벌리려는 퀴어성의 움직임을 보여준다. 퀴어성이 정신병리에 포획되어온 역사가 길었기 때문인지, 이러한 거리두기는 일면 강박적으로도 보인다.

이로부터 미루어 알 수 있는 것은 퀴어성이 하나의 대안규범으로서 작동한다는 사실이다. 퀴어됨이란 특정한 방식으로 섹슈얼리티 규범에 반하는 것이며, 다른 비규범적인 삶들과는 뚜렷하게 구분되는 지점이 있어야만 한다. 퀴어성은 주체성을 획득하기 위해서 규범과 동일하게 병리적이지 않고, 기능적이고 청결하며 정합적이라는 사실을 애써 증명하고자 한다. 그러한 퀴어성의 움직임 아래에서 퀴어 장본인들 또한 퀴어성에 부합하기 위해서 애쓴다. 그러니까, 다시 한 번 연애하고 섹스하는 에이엄브렐라로 돌아가보자. 그들은 연애를 하지 않는다는 수행으로써 증명하지 않는다. “헤테로 연애”를 하는 바이섹슈얼들은, 동성연애로 퀴어성을 수행하지 않는다. 그들은 우리에 미달하며, 내쫓겨야만 하는 존재, 적어도 다른 이름을 받아 마땅한 존재들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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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로서의 자긍심을 갖기 위해서는 우리가 선행되어야 한다. 나, 우리로 자주 호명되는 주체는 언제나 타자에 대한 지시를 통해 생산된다. 그러니까, “이 방식으로 비규범적이다” “그러한 방식은 아니다” 하는 목소리들이 그러하다. 애착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들은 에이로맨틱과 다르다, 하는 말들도 그러하지만 이를테면, 퀴어에 대한 혐오적인 전형에 대한 거리두기도 그러하다.

<록키 호러 픽쳐 쇼(1975)>에는 혐오적인 스테레오타입의 복장도착자transvestite 등장인물이 나온다. 분명 남체인데도 불구하고 진한 화장을 하고 딱 달라붙는 옷을 입고 괴물같은 시종들을 부리며 등장인물들을 꼬신다. 심지어는 순진한 헤테로 여성 등장인물에게 화간을 시도하기까지 한다. 그는 시종일관 노래하며 성질을 부리고 사람들을 골려먹는다. 이 영화는 그 지점에서 해방적으로 여겨졌던 동시에 비판을 많이 받았다. 성적으로 문란하고 조종적이고 폭력적인 악당으로서 퀴어를 묘사했다고들 한다. 오늘날 우리는 입을 모아 말한다. 실제의 퀴어는 그러하지 않다고. 문란하지도, 유해하지도, 폭력적이지도 않으며 비정상적이지 않다고. 그런 식으로 문란하고 유해하고 폭력적이고 비정상적인 이들은 내쫓긴다.

다시, 크로스드레서, 성도착자, BDSM 향유자, 성노동자, 성매개질환 감염자들에게로 돌아가서. 나의 주변에는 내가 앞서 언급한 범주가 아니더래도 본인을 퀴어로 정체화하지 않는 친구들이 많다. 그들은 퀴어성에게 환대받는다고 느끼지 못한다. 퀴어들이 아니라, 퀴어성이라는 비규범적이고 대안 규범적인 섹슈얼리티 자체로부터, 포섭되지 못한다. 그들은 스스로를 퀴어라 부르는 대신 엽기 인생이라 말하고, 변태라 말한다. 내쫓긴 사람들은 다시 모여서, 노 프라이드를 외친다. 인종학살에는 자긍심이 없다no pride in genocide, 성노동자 없이는 자긍심이 없다no pride without sex workers. 노 프라이드는 프라이드에게 되묻는다. 프라이드는 누구를 위해 있는가?

나는 쓴 적 있다. 프라이드마저도 나를 환대해주지 않는다고. 프라이드는 내 머리채를 잡아 끌어내 담론의 격류 속을 헤매게 만들고, 심지어는 나를 약탈하기까지 한다고. 나는 여전히 프라이드와 불화한다. 내가 특정한 방식으로 비규범적인 섹슈얼리티를 수행하고 있다는 사실이 수치스러웠던 적은 없지만, 그로 인해 호출되어 끌려나가는 것을 반겼던 적도 없다. 프라이드가 모든 비규범을 환대해야만 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대안 규범으로서의 주체가 되는 것을 멈출 수 없는 것처럼 불가능하기에. 그러나 프라이드의 환대는, 아니 애초에 환대라는 것 자체는 잔여를 만든다. 배제되는 이를 만들고 거절당하는 이를 만든다***** 우리는 이름 없이 모일 수 없지만, 이름 안에 모두가 들어갈 수도 없다.

환대는 누군가를 거절하고 추방한다. 프라이드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추방된 것들은 언제나 되돌아온다. 프라이드가 남긴 잔여를, 우리의 실패를, 언젠가는, 맞이해야만 한다.


* 에이로맨틱: 로맨틱한 끌림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을 일컫는 성지향성

** 에이섹슈얼: 섹슈얼한 끌림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을 일컫는 성지향성

*** 에이엄브렐라: 무성애적 정체성을 지닌 모든 정체성을 일컫는 성지향성의 범주

**** 긴머: 긴 머리카락의 외양을 한 사람을 일컫는 단어 / 일스: 시스헤테로 여성처럼 보이는 여성애 수행 여성을 일컫는 단어

***** <해체 (자크 데리다)> 참고. 환대받는 손님은 환대받지 못하는 외부인을 필수적으로 수반한다.